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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 교수님한테 옛날에 받은 메일.

by 잭드라로챠 2022. 10.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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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 교수님한테 옛날에 받은 메일.
전공 교수님한테 옛날에 받은 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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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 교수님한테 옛날에 받은 메일..

가끔씩 꺼내 보는데, 내가 이런 메일을 받았다는게 지금도 꿈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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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학생, 내가 강의하는 A과목의 수강 철회에 대해 고민하고 있음을 잘 인지했습니다.

 

우선, 학생이 하는 고민이 충분히 가치있고 경제학도로써 훌륭한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허락된 information set하에서 전략적 사고는 인생의 설계에 매우 중요한 부분이지요. 저도 학부 시절 조기졸업과 장학금이 달려있는 수업을 놓고 중대한 의사결정의 순간을 직면한 적이 있습니다.

 

조기졸업 사정을 위해 필요했던 마지막 전공 수업이었는데요. 그 성적이 제 기대만큼 나와주지 않아 대학원 진학에 필요한 장학금을 신청하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에 쉽싸였습니다. 이렇게 쉽게 털어놓을 이야기지만 그때 제가 느낀 것은 실존적 위기였습니다. 벚꽃은 모두 떨어지고 날은 더워지는데 그 달빛은 얼마나 시렸는지, 91년 4월이 유독 제게 잔인한 이유였습니다.

 

 ○○학생이 고민하는 바가 31년 전의 제 것과 닮아있어, 쉽게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저는 학생이 고민하는 지점의 극히 일부밖에 알지 못하지만, 학생이 알고 있는 것은 그 삶의 전체 내력이니까, 저와 학생 사이에는 결코 매워질 수 없는 크나큰 asymmetry의 간극이 있죠. 그래서 안타깝지만 제가 드릴 수 있는 조언은 '일단 마음 내키는대로 결정하고, 그 뒤에 벌어지는 일들을 담대하게 마주하라'는 것입니다.

 

저와 학생 사이에 존재하는 정보의 간극보다 훨씬 더 큰 간극이 지금 ○○학생과 미래의 ○○학생 사이에 존재하죠. 미래의 일에 대해 고민하며 경제학 이론을 활용하지만, 우리 인생에는 항상 수많은 surprise가 존재하고 그것은 알 수 없을때 아무런 cue도 주지 않고 등장하며 그 파급효과는 우리가 감히 예측할 수 없습니다. 혹자는 경제학자들이 점성술사와 다른 것이 무엇이냐며 비판하죠. 우리가 하는 일은 이제까지의 정보를 바탕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의 결정을 내리기 위함이지만 그러한 노력은 빈번히 좌절되기 마련입니다.

 

그렇기에 학생이 인생에서 그런 중대한 기로에 서게 됐을 때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치열하게 고민하는 일일 뿐입니다. 우리의 지성이 그 답을 내려주지 않을 때, 결국 인간은 직관에 의존하며 다음 여정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떼야 합니다.

 

그러나 '과거의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한 것이기에 그 결과가 어찌된다 하더라도 절대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최선의 노력에서 비롯된 결과일 뿐 아니라, '현재의 나'에게 최악의 결과라 할지라도, 그 다음 여정에서는 그것이 사실은 최선의 결과를 위한 초석이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죠.

 

중대한 결정을 잘 내리기 위한 단 하나의 필요조건은 경제학 지식이 아니라, 스스로를 사랑할 용기일지도 모릅니다. 과거의 나를 항상 보듬어주고 내 결정에 대해 자책하지 않는 태도만이 중대한 결정을 사소한 결정으로 만들고, 어지러운 세상에서 진짜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 보게 해주니까요.

 

다시 제 얘기를 조금 더 해드리자면, 저는 수강 철회를 하지 않은 그 문제의 과목 탓에 조기졸업에 실패함은 물론이고 장학금 수혜자 명단에서 제외되었습니다. 그러나 제 사정을 딱히 여긴 동문 장학회에서 저의 대학원 학비를 지원해주시겠다고 - 기존의 장학혜택보다 네 배 큰 금액을 - 약속 받았고, 그 마지막 수업 때 배운 응용미시경제학 내용은 제 학위과정의 아주 큰 밑거름이 되었었습니다.

 

아마 91년 봄 학기의 성적표를 받아들고 그대로 좌절했더라면, 저는 지금의 제가 되지 못했을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그 역시 나쁜 선택이었으리라고 생각치 않습니다.)

 

도움이 되었을지 모르겠습니다. ○○학생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저는 그것이 절대 틀리거나 옳은 선택이었다고 쉽게 판단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그저 매순간 치열한 고민의 연속으로 채워나가되 그 모든 순간을 스스로 사랑하고 귀하게 여길 수 있길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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